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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

[금쪽상담소] 트랜스젠더 풍자 워커홀릭 체크리스트 자가진단 유형 어버지 커밍아웃과정 어머니 마더링 반동형성

by 보통의행복 2022.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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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문제
쉬지를 못함. 잠자는게 아까움. 오늘도 2시간 잤음. 많이 자면 4시간. 정말 짧게 잘 때는 10분 자기도. 일 외에 소중한 것이 없는 삶. 1년반 전 인공관절수술 받았는데 46시간 물까지 금식한 상황, 8시간 대수술을 받은 후 마취 깨자마자 방송함. 쉬면 심장 빨리 뛰고 답답하고 불안해짐. 수술 후 3개월 정도 거동불가한데 그후 3개월 목발 과정이 있는데 3일만에 걸었음. 내가 잊혀지면 어떡하지 불안해져서 새벽마다 몰래 재활훈련. 움직이다보니 피주머니를 계속 갈았던 기억. 어느날 다리가 아파서 병원갔더니 염증이라고 약물치료 먼저 진행한다 해서 약물치료하다가 일이 바빠서 중간에 치료중단했던 것. 집 주위 자전거 도난사건있어 블랙박스를 제공하는데 그걸 보고 내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병원 갔더니 괴사가 왔고 고관절에 생긴 구멍. 의사 왈 이 정도면 살짝 쳐도 뼈가 으스러질 정도라고. 조금만 늦었으면 평생 휠체어나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하심.


워커홀릭 자가진단 체크리스트(7개 중 4개 이상 해당시 워커홀릭 의심)
- 밥을 먹으면서도 일 처리를 한다
- 일 때문에 병원 가는 것을 여러 차례 미룬다
- 자려고 누웠는데 일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온다
- 일 때문에 휴가를 계획하지 않는다
- 업무에 몰입하면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 현재 일이 순조로운데도 미래에 대해 늘 걱정한다
- 카페인 없이는 하루의 시작이 어렵다

워커홀릭에 빠지는 유형
1. 경제력에 대한 강박관념 가진 사람
2. 완벽추구, 성취 지향적인 사람
3. 자신의 능력을 과장되게 생각하는 사람.
4. 배우자 혹은 가족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사람

내담자 이해
본인의 생명 건강보다 일을 우선시하고 있는데 이는 워커홀릭이라고 함. 일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을 안하면 마음이 불편한 것. 일을 강박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고 일을 주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님. 잘 포장된 심리적인 문제로 볼 수 있음. 워커홀릭 체크리스트 7개 모두 해당. 풍자는 1, 3 유형에 해당하는 듯. (본인의 몸이 편안한 꼴을 보지 못하고 있음. 자기 몸을 혹사 중임. 일 때문에 견디기 힘든 통증까지 잊음) 무통주사를 성전환수술, 인공관절수술 둘 다 맞지 않음. 몽롱한 기분을 느끼기 싫었음. 안 아플 것 같았고 수술 중 휴대폰 업무를 했음. 내시경도 비수면으로. (손톱 살을 뗀다든가 딱지를 뗀다든가 자해를 했던 적?) 예전엔 자해를 했었음. 성 정체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본인의 행복을 위한 과정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고 바짝 긴장한 상태가 편한 풍자) 성형수술 시 수면마취하라는데 부분마취 하기도. 맨정신이 아니면 불안. (통제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 외부 요인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대한 불안. 마치 전쟁시 잠들면 안 되듯 위급 상황에서 나타나는 방어태세. 혹시 언제나 전쟁 같은 위기에 대응하는 삶이었나?) 화장실에서 술취한 여성분이 변기로 끌고가 같은 여자니깐 보여주면 안되냐며 갑자기 가슴을 만지고 모양이나 기능을 서슴없이 묻는 사람들. 나는 트렌스젠더라는 이유로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부분을 의무적으로 대답해야하는 상황. 악플들에 타격받지 않는 모습? 너무 심심할 때 악플을 찾아보기도. 재밌음. 트랜스젠더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 이사계약을 했는데 집주인분이 파기를 하며 온갖 차별과 혐오 발언을 하심. 여자로 산다는 애가 목소리가, 외모가 왜 그렇냐는 악풀러에게 바비인형으로 살고 싶은게 아니라 그냥 여자로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함. (인간의 내면의 아픔은 종류가 다양한데, 그 아픔을 누구도 대단할 수 없고 손가락질 할 권리가 없음. 의연하단 건 내상을 입지만 그냥 꿋꿋하게 견뎌가는 것이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님. 아무렇지 않다고 표현하는 게 걱정스러움. 트랜스젠더를 대변해서 하는 건 이타심으로 당당하게 말하지만, 개인 내면의 아픔을 말하는 건 어려워하는 것 같음) 내 마음을 공유 못하는 듯. 힘들면 일단 참음. 혼자서 버티고 문제 해결후 말함. 지금 이야기를 하면서도 진짜 내면 이야기가 나올까봐 꾹 누르는 듯.

커밍아웃 과정
아버지께 커밍아웃을 3번을 함. 첫번째는 주변인을 통해 들으셨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심. 반항의 표현을 받아들이고 웃으며 넘어가심. 두번째는 너무 많은 누물을 보이심.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병으로 여긴 아버지. 정신적 문제로 생각하시고 어떻게든 고쳐주겠다는 반응. 세번째는 심각성을 아시고 칼을 두고 대치를 함. 성전호나 수술 후 아버지 찾아갔는데 나는 죽어도 이해 못한다고 하심. 네 뜻을 굽히지 않으면 이 칼로 나를 찌르고 가라 하심. 아빠가 원한다면 평생 남자를 연기하고 살겠지만 그건 아빠를 위한 삶이지 내 인생은 없지 않느냐 6시간 이야기했는데 받아들이지 못하심. 잠시 담배피우러 나가신 사이 도망나왔고 10년간 가족을 보지 못한 상황. 당시 19, 20세. 수술은 마쳤지만 주민등록번호 법적으로 남성인 상태.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지만 또 한 번 아버지와 갈등이 생길까 두려움. (현재 아버지와의 관계?) 어느날 갑자기 걸려온 아버지 전화, 내내 울기만 하심. 아빠가 된장찌개 해줄테니 집으로 오라고. 그 후로 온 가족이 모였는데 서로 못 알아봄. 막내동생때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나보다 키가 커져버림. 가족인데 너무 어색했음.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지금은 잘 지내고 있음. (아버지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딸로서 받아들여 줬으면 하는 바람이 많은가?) 처음에는 그랬는데 어느날 술을 드시고 전화했는데 우리 아들 우리아들 펑펑 우시면서 우리 큰아들 죽은 것 같다고 하심. 나의 자식인 건 변치 않지만 나의 아들이 죽은 것 같다고 못 받아들이겠다 하심. (본인 삶의 결정권이 있는 성인이지만 아버지는 딸로 받아들이긴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음. 부모의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 딸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행동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아버지)


성장과정
막내동생 3세 무렵 돌아가신 어머니. 내가 15살가량. 할머니가 돌봐주신 삼남매. 1년 반만에 돌아가신 할머니. 아버지는 지방으로 일가시고 삼남매끼리 지냄. 씻기고 학교 보내고 밥 먹이고 10대부터 가장이자 엄마. 6개월-1년에 한번 집에 아버지가 오셨고 한달에 3만원 받아서 기름값을 댈 수 없었던. 애들 다 안고 자면서 동생들이 알림장 가져오는게 가장 힘들고 빌려서 챙겨주고. 2000년대인데 동생이영양실조가 오고 의식주 전혀 해결되지 않던 상황. 동네 어른들이 음식을 주시면 너무 감사한데 곰팡이가 있기도. 동생들이 부모없는 아이라고 애들 놀리면 무너지겠고 매일 제발 저만 가난하게 해달라고 했던 것 같음.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됨. 본인도 보호가 필요한 나이인데 풍자의 마음은 부모의 심정임. 이걸 마더링(Mothering)이라고 함. 누구를 원망할수도 삶을 포기할수도 없고 동생을 돌봐야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때의 감정은 설명이 안됨. 어떻게 살았지라는 생각이 들음. 가출을 할까 하다가도 내가 없으면 동생들이 어떡하지. 평소 고맙다는 표현을 안 하던 남동생이 생일에 편지로 네가 어른이란 이유로 혼자 참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며 너는 애 엄마고 아빠라고 글써줌.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 (왜 이렇게 일을 안하면 불안한 워커홀릭이 되었는지 이해가 됨. 이유는 어린 나이에 너무 궁핍했고, 그 가난을 동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일에 매달렸단 생각이 들음) 너무 기본적인 거도 안 되는 상황, 옛날 생각만 하면 동생들이 생각. 다시 옛날 찾아와도 겪을 수 있고 괜찮을 것 같은데 굳이 동생들은 안 겪었으면 하는 바람. 편했으면 좋겠고 일을 안 하면 불안하고 다시 옛날처럼 가난해질까봐.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을 키워온 풍자. 그 안에서 삶의 정당성을 확인한 것 같음. 이타적인 모습이 많은데 좋지만 정작 나 자신은 돌보지 못하고 있음. 나의 삶보다 타인의 삶을 위해 살아온 것. 아버님을 절대 원망하는 건 아니지만 몇개월에 한번씩 오시는데 서운하진?) 없었음. 지방에서 일하고 계셨지만 6개월, 8개월, 1년만에 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음. 심정을 이해했기에 원망하진 않았음 (우리의 꼬질꼬질한 모습을 보면 아버지가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는 자식-아버지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 그건 풍자씨가 걱정할 부분이 아님. 인간은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대상. 사랑, 보호, 위로, 의지. 이걸 못 받으면 마음에 구멍이 생김.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인정하고 직면해야 내가 나를 잘 이해할 수 있고,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데, 내면이 성숙해가는 과정 속에서 어떨 때는 부모에게 서운함, 원망 등의 감정이 생김. 그런데 풍자는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직면하지 못하는 것 같음. 인간이기에 자연스럽게 느끼는 원망의 마음을 부정하기 때문에 '반동형성' 즉,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 힘들다고 투정하지 못했던 어린시절을 직면하지 못하면 원망과 서운함이 드러날까봐 두려워서 진짜 속을 들어가지 못함) 생각해보면 한번도 그런 얘기를 해본 적 없음. (힘든게 당연했던 것.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나) 스스로 세상을 등지심. 사기의 충격에 돌아가셨음.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더이상 해드릴게 없다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족과 함께하라고 권유. 병원에서 어린 친구들은 옮을 거라고 피부병처럼. 동생들은 교회 목사님께 맡기고 홀로 어머니를 간호함. (제초제는 마시면 폐에 섬유화, 호흡곤란으로 돌아가시는데 농약 등을 마시면 위세척을 시행하는데 독성이 강한 제초제로 토사물이 위세척하는 사람에게 묻어도 몸에 흡수되어서 전신에 장비 착용 후 위세척을 진행함. 어머니의 사고 후 모든 과정을 풍자씨가 감당?) 아버지는 지방에. 제가 임종까지 다 봤으니깐. 방 한 칸에서 잠그고 엄마와 나랑 단둘이 있자고 했음. 일주일간 자본 적 없음. 아직도 생생한데. 혹시나 내가 자는 사이 엄마가 돌아가실까봐 (그래서 지금도 각성을 하고 있는것 같음) 어디서도 얘기해본 적 없는데 제가 잠을 자고 있을 때 엄마가 농약을 드심. 빈소에서 든 생각이 왜 바보처럼 내가 잠을 잤을까. (결코 풍자 씨 탓이 아닌데 내가 깨어있었으면 막을 수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이 자꾸 드시는군요. 편하게 대자로 자는 것도 죄책감이 느껴지고 휴식을 취해도 죄책감이 느껴지고 쉬없다 일이 끊기면 어떡하나 불안함,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가면 어떡하나가 너무도 당연했고 가엾음) 음독 후 일주일동안 밥을 전혀 못드셨는데 내가 먹는것도 자는 것도 죄스럽고, 집을 나와서도 동생들을 두고 혼자 밥 먹는 것도 모든 행동이 다 죄스럽게만 느껴지고 죄인이었음. (부담스런 질문일 수 있는데 어머니 타개 후 산소에 찾아뵈러 간 적?) 한 번도 안 가봤음.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 제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깐. 더 못가겠음. (마음의 준비가 되면 어머니 산소에 뵈러 가셨으면. 어떤 모습이어도 어머니는 반가워하시고 보고싶어 하실 것) 엄마 돌아가시고 엄마 보고싶다 생각해본 적 없는데 보고싶음.

솔루션
"풍자야! 이제 나를 품자!" 보미야. 이제까지 참 열심히 꿋꿋하게 잘 살았어. 주변에서 뭐라고 말하든 어떤 시선으로 대하든 그냥 보미는 열심히 생존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로 귀하고 소중해. 건강을 좀 돌보고 이제는 자신을 너무 아프게 하지 말고 건강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래야 주변 소중한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하니 휴식도 하고 잠도 자고 지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너무 마음 고생이 많았다 보미야. 애썼어. (엄마가 살아계시면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줬겠구나 싶어서. 과정과 답이 문제가 아니라 그 답을 내가 가지고 있었네 생각이 들었고 내가 애써 외면했던 나를 만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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